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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과 창자 ..............................(수주연45)

이름
:  정 바오로 신부  작성일 : 2003-11-15 10:10:15  조회 : 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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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16일  연중 제 33주일.   
                저의 졸필을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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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장과 창자

                              ***  홍익만 안토니오  ***


  조선교회 창설 이후 우리의 신앙선조들 중 열심한 이들은 반드시 교우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천주교 신자라는 비밀을 유지하는데 유리하였고, 또 가정 공동체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박해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20세기에 들어서도 구교우 집안끼리의 혼인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게 된다. 


  조선 초기 교회사에서 유명한 홍익만(안토니오)도 천주교에 입교한 뒤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시집보냈으니,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아들 홍필주(필립보)와 여주 출신의 순교자 이현(안토니오)이 바로 그의 사위들이었다. 

  홍익만(안토니오)은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경기도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서울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당시에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었는데, 그에게 세례를 준 이는 다름 아닌 이승훈(베드로)이었다.

  즉 홍익만(안토니오)은 1785년 무렵에 우연히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그 길로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서적(천주실의)을 빌려 읽
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가르침이 타종교와 크게 다르고, 그 뜻의 심오함 역시 놀라워서 더욱 심취하게 되었으며, 드디어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홍익만(안토니오)은 이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소공동체 모임을 갖거나, 때론 천주신앙을 주야로 토론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한 생활을 하던 중 1791년 북경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상제사 금지령이 조선교회에 전달되자,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폐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주변 환경 탓에 끝내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었으니, 그로인해 제사에 참여할 때마다 그는 스스로 괴로움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1796년 홍익만(안토니오)은 사위 홍필주(필립보)의 집에서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곤 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더없이 큰 영광이요 은총이었다. 그리고 3년 뒤 평신도 단체인‘명도회'가 조직되자 자신의 집을 명도회 산하에 있는 집
회소로 제공하였으니, 이 하부 집회소들의 이름이 곧 ‘6회’(六會)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익만(안토니오)은 교회 지도자로 밀고 되었다. 이에 그는 서울을 떠나 안산, 여주, 이천 고을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나 그의 종적을 쫓는 포교들의 발길은 집요하여 어떤 때는 마을에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산골에서 열흘 가까이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 결국 지방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홍익만(안토니오)은 교우들을 밀고하고, 교회서적을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혹독한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다.

  교우들과의 절친함이 형제와 다르지 않거늘 어찌 그들을 밀고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박해자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제가 지은 죄가 용서받기 어려운 것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몇 달 동안 도망을 다니다가 비로소 체포되었습니다. ……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어찌 따로 진술할 말이 있겠습니까?”

  체포될 때부터 이미 그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순교의 원의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목소리가 오늘 우리의 귀에 이렇듯 생생하게 들려온다.

  그의 말대로 천주님과 교우와 자신의 관계가 마치 위장과 창자와 같은데 이것이 어찌 단절되어서 살 수 있겠는가!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구산성지 정종득(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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