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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순례자의 땅 .........................(수주연28)

이름
:  정바오로신부  작성일 : 2003-07-11 16:54:03  조회 : 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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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일, 저의 졸필을  수원교구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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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순교사와 순교터

                        ***  영원한 순례자의 땅  ***


  여주의 첫 신자는 1791년 이전에 입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였다. 여주 가마골 출신의 정광수 (바르나바)도 이 무렵에 입교하였으며, 그의 누이 정순매(바르바라)도 얼마 후에 교리를 배우고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어 1797년 가을에는 여주의 유명한 노론 집안 출신인 김건순(요사팟)이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중배(마르티노)·원경도(요한)·이희영(루가)·정종호 등에게 교리를 전하게 된다.

  그러나 김건순·이희영은 아쉽게도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하였다. 반면에 최창주· 이중배· 원경도· 임희영· 정종호 등 5명은 1801년 3월 13일(양력 4월 25일) 여주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말 그대로 한 날 한 시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에 앞서 여주에서 체포된 예비 신자 조용삼(베드로)은  경기 감영에서 형벌을 받던 중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순교하였다.

  이어 5월 24일(양력 7월 4일) 에는 정순매가 여주 형장에서 처형되었고, 1801년 말에는 다시 과부 이씨와 친척 1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면 이들 순교자를 탄생시킨 여주의 형장은 어디인가? 박해사를 기록한 이기경의 (벽위편) 에는 여주의 처형지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유 3월 15일. 경기 감사 이익운이 장계하기를,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에서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고 죄인 이중배· 임희영·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등을 법률에 따라 참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

  지금의 여주는 1469년(예종 원년)에 여주목으로 승격된 이래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현재의 읍내는 서에서 동으로 대로사(송시열의 사당), 여주초등학교, 여주 군청이 차례로 자리잡고 있는데, 조선 후기의 읍지에도 객사를 겸한 청심루와 관아가 이들 자리에 그려져 있다. 

  또 옥거리·구 장터·사직단 등의 옛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여주 남쪽을 반달과 같이 가로 지르는 도로, 가남과 장호원으로 가는 도로도 예와 지금이 같다. 

  여주목 관아는 현 상리에 있는 여주초등학교 서쪽 편에 남향으로 위치해 있었다. 또 관문인 영월루(1925년 마암으로 이전 복원됨)에서 남으로 3리 지점에 향교(현 여주읍 교리)가 있었고, 관문에서 동으로 3리 지점에 사직단(현 여주읍 창리)이 있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처형지인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진 곳”은 관문인 영월루와 향교 사이의 1/3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남쪽의 큰길”은 어느 도로를 말하는가? 위치상으로 볼 때 여주에서 가남 혹은 장호원으로  가는 도로를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도로는 여주읍내를 남으로 반달과 같이 가로지르는 현 도로와 한 지점에서 만난 뒤 다시 나뉘어지고 있는데, 이곳은 지금의 창리와 하리 사이의 로타리 부근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주의 순교 터는 창리·서리 사이 즉 창리에 있던 구 장터와 옥
거리에서 가까운 로타리 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곳은 여주 관아의 남쪽 1리쯤(300∼400m) 되는 지점으로, 민가와 시장 사이에 있었으므로 백성들을 모으기 수월했을 것이다. 

  여주의 순교 터(현 여주 로타리)는 여주성당에서 남쪽으로 200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이곳 여주 옥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면서 혹독한 형벌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만 했다. 

  그런 다음 마침내 이곳 형장으로 끌려나와 박해의 칼날 아래 이슬처럼 사라지게 된다.

  1801년 봄에 떼 죽음을 당한 5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꽃피는 5월에 목숨을 바친 정순매의 처형지도 이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단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새로운 탄생이며 부활이었다. 

  순교터라면 더욱 좋겠지만, 여주성당 구역 안에라도 그분들을 기리는 순교사적비를 세우고 영원의 순례를 계속해 나간다면, 그 때 부활은 진정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끊임없는 사랑과 겸덕을 갖추신 여주성당의 신부님과 교우들이 이보다 더 의미있는 영원한 순례자의 땅으로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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