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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회장의 효시! ............................(수주연33)

이름
:  정바오로신부  작성일 : 2003-08-23 10:26:00  조회 : 7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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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
                                저의 졸필을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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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덕운 토마스 ②


                                    ****  연령회장의 효시! ****



  한덕운(토마스)의 마음은 기도와 신심생활 가운데서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기쁨은 언제고 순교의 영광으로 승화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의일리로 이주한 지 얼마 안되어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의일리에 사는 한덕운(토마스)에게 들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순교의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덕운은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천을 지나고 동재기(현 동작구 흑석동)를 거쳐 한강에 당도하였지만, 배를 구할 수 없던 그는 좀더 하류로 내려가 노들나루(지금의 노량진)에서 겨우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배에서 내려 한양 도성으로 향하던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거적으로 덮여 있는 한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인근 주민들이 '조정에서 녹을 먹던 관리로 홍낙민이라고 하는 사학쟁이'라고 하면서 침을 뱉으며 지나가곤 한다.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한 홍낙민(루가)의 시신을 그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이 여기까지 몰래 가져왔지만 그 자신도 이내 체포되는 몸이 되어 부친의 시신을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된 것이다.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무렵의 일이었다.

  순교자 홍낙민의 시신인 것을 안 한덕운(토마스)의 마음은 놀라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덕운은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한 뒤 어렵게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홍재영이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

  이후 홍재영은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1839년에는 마침내 부친의 뒤를 따라 순교하게 된다.


  홍낙민의 장사를 지낸 지 한 달 만에 한덕운(토마스)은 서소문 밖에서 또다시  한 구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5월 14일에 순교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이었다.

  이에 그는 다시 비밀리에 그 시신을 염해다가 장사를 지내주었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버려져 있는 사학쟁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얼마 안 되어 박해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한덕운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한덕운(토마스)이 처음 끌려간 곳은 포도청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오랫동안 신봉해 온 사실과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사실만을 인정하였다. 상급 관청인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이러한 그의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었다.

  형조의 관리들은 한덕운(토마스)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형을 언도한 뒤, ‘그가 살던 광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덧붙였다.

  이에 따라 한덕운은 포졸들에게 이끌려 광주 남한산성으로 이송되었
고, 즉시 동문 밖으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순교 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한덕운(토마스)이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이러하였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리가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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