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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세   례   명

순교 년 월 일

연령

형벌

비             고

출신지

김 성 우

안토니오

1841.04.29

47

교수형

한양에서 교수형(회장)

구  산

김 만 집

아우구스띠노

1841.01.28

44

옥   사

김성우의 첫째동생

구  산

김 문 집

베드로

1868.03.08

69

참수형

김성우의 둘째동생

구  산

김 성 희

암브로시오

 1868.03.08

54

참수형

김성우의 외아들

구  산

최 지 현

휘두

1868.03.08

52

참수형

최치원의 후손

구  산

김 경 희

 

 1868.03.08

46

참수형

김문집의 아들

구  산

심 칠 여

아우구스티노

1868.03.08

41

참수형

구천사람(현 강일동)

구  산

김 차 희

 

1868.03.08

40

참수형

 김만집의 둘째아들

구  산

김 윤 희

 

1868.03.08

35

참수형

김성우의 조카

구  산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성우 안토니오는 1795년에 경기도 구산(현 경기 하남시 구산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미 여러대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꽤 부자소리를 듣고 지냈다.
삼형제중 맏이었던 성우는 성품이 온순하고 너그러웠으며 아직 외교인이었을 때부터 모든이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종손들이 고향에서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은 사람들이 그 증조부의 유덕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김성우와 그의 형제들은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자 그것을 알아 보고 신봉하려 하였다. 어머니는 외교인으로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다행이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여 선종하였다.  후 얼마 안되어 자녀들도 입교하게 되었고 김성우는 중국인 유신부로부터 직접 영세하였다.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마침내 구산이라는 동네는 열심인 천주교부락이 되었다.  
김성우는 고향에서 수계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뿐더러 성사를 좀더 용이하게 받으려는 의도에서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누리골에 살다가 얼마후에는 동대문밖 마장안에 큰 집을 사서 이사하였다.  그리고 집에 조그마한 경당을 마련하고 한동안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열심히 이웃을 권고하였고, 비록 자신의 생활이 넉넉하였을지라도 세상 재물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는 동안 상처하고 열심한 교우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즐거운 가정을 이룩하는 한편 더욱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그가 체포된 것은 기해년도 다 저물어가는 섣달 20일경이었다.(1841년1월) 한 배교자의 고발로 포졸들이들이닥쳐 성우와 그의 사촌 김 스테파노를 잡아갔다. 김 스테파노는 시골에서 다니러 왔다가 변을 당했고, 성우의 아내와 딸은 피신하여 구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성우의 집과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한편 구산에 살고 있던 두 동생은 박해가 일어나자 곧 잡히어 막내 동생 아우구스티노는 43세로 옥사하고, 맏동생은 옥중살이를 하고 있었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감옥을 마치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여기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고 따라서 옥중생활 15개월 동안 살아보겠다거나 석방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한다.  

외교인 죄수들까지도 그의 설교를 즐겨 들었다고 하며 그의 설교가 아주 감명적이어서 그중 두 명이 입교하게 되었다. 한번은 문초때 성우가 판관에게 "당신의모든 문초와 권고에 대해서 대답할 말은 한가지 뿐입니다. 즉 나는 천주교인이고또한 천주교인으로서 죽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포청에서 형조로이송되어 1841년 4월 말에 그는 다시 법정에 출두하여 곤장 60대를 맞았으나 그의 훌륭한 용기는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이튿날밤, 즉 그달 29일 옥중에서 선종하니 그의 나이 47세였고 옥에 갇혀있기 실로 15개월이었다.  

그의 시체를 거둔 교우들은 한결같이 그의 교수치명을 입증했다. 왜냐하면 김성우 안토니오는 목에 교수된 흔적이 뚜렷하
기 때문이다. 그의 시체는 구산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김성우 성인은 처음 남한산성 옥에 갇히어 있다가 서울 의금부로 옮겨간 것 같다. 이렇게 해서 1838년 말에 시작된 박해는 1841년 4월 29일 김 안토니오의 순교로 종말을 고하였다. 기해년의 박해는 강원, 충청, 전라 등에 전반적으로 미쳤으나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가장 심하였고, 따라서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도서울이다.
서울에서 대략 2백여명의 교우가 잡혀 그중 50여명이 참수되었으며, 60여명이 목이 졸리었고, 또는 매로 또는 병으로 옥사하였다. 이에 '기해일기'에 오른 순교자수는 78명으로서 그중 8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성인품에 올랐다. 박해후 한국교회의 참담한 광경은 이루 표현키 어려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세분의 목자를 모두 잃게 되어 다시 목자없는 고아가 되어 버렸다.  유진길, 정하상,조신철 등 지도급 평신도들도 거의 다 희생되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히도 현석문, 이 베드로, 최 베드로 등 선교사의 측근자가 몇명 살아남음으로써 이후 교회의 재건을 꾀하고 선교사 영입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이미 몽고에 와서 우리 신학생들과 함께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김대건이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1845년 10월에 주교와 함께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이듬해 선교사들을 위한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고자 연평도 앞바다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붙잡혔다. 그래서 병오(1846년)박해가 시작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자는 덕심(德深) 또는 치영(致英)이고, '만집'은 그의 보명인데, 교회사의 기록에는 '덕심'이라는 자로 나온다.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만집·문집 형제와 사촌 김주집은 함께 재판관 앞에 나아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만집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주교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父] 이적(夷狄)·금수(禽獸)의 교가 아니라 천주님의 참다운 진리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를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사령들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것과 비슷한 말만 하면 석방될 수 있다'고 회유하였지만,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주 유수는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한 겨울 내내 그대로 방치하였다

1840년에 김만집의 아들들은 부친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면서 한때 석방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도 가졌으나 그 자신은 조금도 석방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유수도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김만집은 장남 원희(元熙)와 차남 차희(次熙)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 장남의 나이가 14세였으니, 차남은 10세 전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 구산 마을에 전해 오는 전승에 따르면, 그가 남한산성에서 옥고를 치를 때 집안 사람들이 교대로 밥을 갖다주었는데, 돌아올 때면 눈물이 밥그릇에 가득 괴었다고 한다. 구산에서 남한산성까지는 40리가 넘는 고개 길인데 날마다 걸어서 밥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끝까지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숨을 거둠으로써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자는 윤심(允深)이며, '문집'은 그의 보명이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문집은 형 김만집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며 여러 차례의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천주가 진리임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재판관은 끝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둔 채 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형 김만집이 이듬해 초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김문집과 사촌 김주집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방되지 않은 채 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김문집은 형들과 같이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순교의 열망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868년(戊辰年)에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후손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만일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광스럽게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敎翼, 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자는 희백(喜伯),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였다. 그의 세례명은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훗날 족보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敎翼, 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김성희는 부친 김성우가 1841년에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약국을 경영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60년경에는 매부 홍희만(洪喜萬)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전교와 신앙 생활에 열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이겨낸 뒤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그의 양자 김교익이 밤에 몰래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최지현은 경주 최씨로, 자는 군실(君實)이다. {좌포도청등록}(左捕盜廳謄錄)에는 그의 세례명이 휘두(揮斗)로 나오는데, 이것이 정확히 어떤 세례명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구산 마을에서 부친 최규겸(崔奎謙)과 어머니 교하 노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훗날 용인으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아내 함열 남궁(南宮) 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가 1860년경이었다. 그 후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아내가 먼저 체포되어 순교하자, 그는 박해를 피해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1868년에 체포되고 말았다.

{좌포도청등록}에 따르면, 최지현은 1868년 윤4월 4일 51세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趙宗九, 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閔孝源, 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洪喜萬), 경기도 구산 태생 심칠여(沈七汝,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친척이 찾아다가 그 집 산에 안장했었는데, 1978년에 순교자의 후손들이 구산으로 이장하였다.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致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鎭煥)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從台)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열심히 생활하다가 1868년에 부친과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압송된 그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키고 1868년 2월 15일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거두어져 구산에 안장되었다. 



                                                                         


심칠여는 구산 신자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오지 않던 순교자이다. 그러나 {좌포청등록}에 따르면, 구산 태생으로 1859년 무렵에 이웃 마을에 살던 신자 심성일(沈聖一)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1864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성인 주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심칠여는 1868년 윤4월 4일에 강원도 원주 태생 조종구(타대오), 경기도 지평 태생 민효원(나자로), 경기도 광주 태생 홍희만, 경기도 구산 태생 최지현 등과 함께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처음의 문초 때에 그는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돌려 굳게 신앙을 고백한 뒤 많은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자는 희선(希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 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