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1월 19일 연중 제 2주일에 연재한 글입니다. *****************************************************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주역 **** 이벽(세례자 요한) 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1 - ****
지난해 2월 16일 성 라자로 마을의 '아론의 집'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과 신앙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 발표와 토론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분들과 관련된 문제, 특히 "과연 그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는 있었으나 명쾌한 해답은 아쉽게도 얻을 수 가 없었다.
우리는 천진암을 순례할 때마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들이 안장되어 있는 묘역을 찾곤 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벽(세자 요한),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이승훈(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를 드리거나 묵상을 한다.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교회사가들의 이들의 순교에 대한 평판이 어찌되었던 우리는 그분들이 바로 한국천주교회의 첫 번째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권철신과 일신 형제는 경기도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며, 이벽은 경기도 광주에서, 이 승훈은 한양의 중림동(현 서울의 서부역 앞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들 중 권철신은 다른 이들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이벽은 1781년 무렵 한양의 수표교 앞마을로 이주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통을 고집하는 집안의 환경에서 벗어나 천주 신앙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려는 데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들 중에서도 이벽(1754~1785년)과 권일신(1742~1792년)은 신앙 때문에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서 한국천주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분들의 생애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길지 않아도 될 것이다. 1784년 겨울, 이벽과 권일신은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의 주도 아래 개최된 최초의 세례식 때 세례를 받고, 새로 탄생한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일어난 "명례방(=명동) 사건"으로 인해 첫 번째 풍파를 당해야만 하였다. 사건 직후 이벽은 집안에 감금되고 말았는데 그 집은 수표교 앞에 있던 새집이 아니라 광주 본댁이었던 것 같다. 부친 이부만은 이때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하여 갖은 회유책을 썼으며,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살 하겠다'고까지 위협하였다. 또 아들의 친구를 시켜 이벽의 배교를 유도하는 계략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당시 이벽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중적인 말로써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다는 설명이 있는가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굶어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명례방 사건 이후 집안에서 약을 먹여 죽였다는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으며, 1786년 봄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사식(史識=역사가의 관찰력)이며, 얼마큼 그 시대적 입장에서 보느냐 일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지속적이고도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어찌되었던 "이벽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을 것이다"라는 추정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작성일 : 200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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