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김문집 베드로(1801~1868)
끈기의 십자가

“만일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광스럽게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

– 순교자 김윤심이 가족들에게 전했던 신앙유산

 SketchStory

-천주교인의 향기 십자가/ 끈기의 십자가-
 십자가는 포승줄로 만들었다.
포승줄! 잡혀갈 때 포박되는 도구였지만 오히려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다. 긴 세월의 옥고 속에서 박해자들이 자신을 옭아매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았던 거룩한 순교자 김윤심의 삶을 형상화하였다. 십자가 끝에 있는 네 개의 꽃은 20여년간의 옥살이에서 피어난 영광의 꽃을 의미한다. 그 꽃은 사시사철 향기를 뿜어 내고 있다.
 중앙의 꽃은 예수 그리스도의 꽃으로서 그분의 향기를 지닌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간직 한 천주교인의 향기를 십자가로 표현하였다.

 김문집 베드로(金文集, 1801~1868)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자는 윤심(允深)이며, ‘문집’은 그의 보명이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 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문집은 형 김만집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며 여러 차례의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천주가 진리임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재판관은 끝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둔 채 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형 김만집이 이듬해 초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김문집과 사촌 김주집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방되지 않은 채 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구산 마을에 전해 오는 전승에 따르면, 그가 남한산성에서 옥고를 치를 때 집안 사람들이 교대로 밥을 갖다주었는데, 돌아올 때면 눈물이 밥그릇에 가득 괴었다고 한다. 구산에서 남한산성까지는 40리가 넘는 고개 길인데 날마다 걸어서 밥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김문집은 형들과 같이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순교의 열망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868년(戊辰年)에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후손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만일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광스럽게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敎翼, 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