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김차희(~1868)
증거의 십자가
“그건 내가 대답한 말이 아니오.
난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소”
-순교자 김차희의 심문 중에서-
SketchStory
-증거의 십자가=
한 눈에 들어오는 중심 십자가 옆 그물 모양의 12개 사각문양이 있다. 이 그물모양의 사각을 이용하여 수많은 십자가를 만들 수 있다. 적어도 30개 이상의 십자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십자가는 그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천주님을 증거했던 것을 의미한다. 특히 매순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용덕의 실천가로서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김차희 (金次熙, ~1868)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자는 희선(希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 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