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과 순교자
注)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선정, 교황청 승인 2013년 4월 26일)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는 구산마을 부유한 양반집에서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달레 교회사에 따르면 그들 형제의 정직과 너그럽고 속 깊은 마음씨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830년대 초 구산마을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김성우 안토니오가 막내 동생과 함께 제일 먼저 입교하였고 이어서 둘째 동생을 비롯하여 친인척들과 마을 사람들까지도 입교시켜 구산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의 하느님 사랑은 열렬했다. 전 재산을 교회에 봉헌하고 자신의 집을 공소로 만들었다. 모방 신부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고 그때부터 일생을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 살았다. 그의 선교 열정은 감옥에서도 불타올라 포졸들이 세례를 받게 할 정도였다. 1841년 4월 28일 한양 포도청에서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며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덕심 아우구스티노(1798-1841)는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이며, 만집이 라고도 한다. 유교사상에 물들어 있던 그는 입교를 망설였다. 그러나 형 김성우 성인과 동생 윤심의 모범적인 삶에 감명을 받아 입교하게 된다. 회장직을 맡은 김성우 성인을 도와 복음 전파에 헌신했다.
박해 때에도 큰 소리로 천주교의 참된 교리를 설파하였고 20개월이 넘는 감옥생활의 고통을 감수인내하며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으로 1841년 2 월19일 옥중에서병고로 순교하였다. 형제 중 가장 늦게 입교하였지만 구산에서 첫 번째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김윤심 순교자(1801-1868)는 김성우 성인의 셋째 동생이며, 문집이라고도 한다. 큰형과 함께 입교하여 형을 따라 전교에 힘썼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회 안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짐작된다. 기해박해로 피폐된 구산공소를 재건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포졸에게 잡혀 남한산성 옥에서 20년간의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였다. 20년간의 옥살이! 지옥처럼 어둡고 험한 감옥 속에서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악취를 참고 견디어야 했던 오롯한 천주신앙의 소유자이다.
김성희 순교자(1815-1868)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이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부친과 삼촌을 차례로 잃고 구산공소가 피폐해져 갔지만그는희망을 잃지 않았다. 차분히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할 방도를 모색하며 뿔뿔이 흩어진 집안과 신앙심이 약해진 친적들, 마을 사람들을 격려하며 구산공소를 재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 하며 생계를 꾸리는 한편, 가난한 이들은 무료로 치료해주는 등 애덕실천 가의 삶을 살았다. 약방은 남의 이목을 피하여 신앙을 지키고 전교활동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68년 3월8일에 순교한 그는 지금도 후손들에게 “약방 할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김차희 순교자(1829-1868)는 김만집 순교자의 둘째 아들이다.
사촌형 김성희 순교자처럼 그는 침술에 능통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며 활발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다가 병인박해 때 가족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관아에서 수차례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천주님을 증거하였다.
그는급환에 걸린포교의 아들을 침술로 소생시켜 준 댓가로 직접적인 배교없이도 석방될 수 있었다. 관장의 배교 강요에 그포교가 김차희를대신하여 배교한다고 대답해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건 내가 대답한 말이 아니오. 난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소!”라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친척들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처형되어, 구산 마을 교우촌 역사 속에 의롭고 용감한 신앙 실천의 전통을 남겼다.
김경희 순교자(1823-1868)는 김윤심 순교자의 아들이다.
그가 17세 되던 해부터 부친이 남한산성 감옥에서 20여년동안 옥살이를 한다. 식구들은 번갈아가며 부친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특히 매일 구산에 서40리 길을 걸어 밥이나 죽을 담은그릇을 들고 남한산성의 북문을 통과하여 부친을 뵙고 돌아오는 길이면 부친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빈 밥그릇에 흥건히 고였다고 한다.
병인박해 때에는 온갖 협박과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하였다.
김윤희 순교자(1843-1868)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의 아들이다. 사촌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는 자손이 없어 안타깝게도 그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순결한 영혼은 천상에서 영복을 누리는 영예를 얻었으리라.
최지현 순교자(1818-1868)는 구산 마을이 완전한 교우촌으로 변화된 1838년 이전에 용인으로 이사 가서 살다가 부인 함열 남궁씨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병인박해(1866년)가 시작되어 부인 남궁씨가 먼저 관가에 붙잡혀 순교하게 되자,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떠돌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나중에는 그도 포도청에 체포되어 몇 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심한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천주교를 배우기는 했으나 재미를 못 느껴서 영세를 받지도 않았고 선교사와 상종하지도 않았다”고 허위 고백하는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목격하고 장례를 지냈던 집안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후 최지현은 곧 참회하고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한다.
심칠녀 순교자(?-1868)는 구산태생으로 신분이 머슴이었다. 천주교인이었던 그의 주인은 그에게 “천주교를 잘 믿으면 죽은 뒤에 영혼이 반드시천당에 올라가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라며 전교하였다. 그는 1864년에 베르뇌 장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가 포도청에 끌려가 처음 심문을 받았을 때는(1868년 음력 윤4월 4일) 나약한 마음에, “영세도 받지 않았고 생계에 몰두하다 보니 자연히 천주교 를 믿지 않게 되었다”며 배교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심문에서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은 사실을 시인하면서 어제 말한 내용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백한 것이라고 하면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농락당했다고 생각한 형리들이 그를 마구 때려 심문 장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