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김윤희 (1834~1868)
완덕의 십자가

“남한산성 동문 밖에 버려져 잃어버린 시신”

 SketchStory

 -완덕의 십자가-
 십자가는 포승줄로 만들었다.
구산성지에 있는 묘는 모두 순교자들의 유해가 있는 진묘(眞墓)이나 김차희, 심칠녀, 김윤희의 묘는 유해는 없고 비석만 있다. 왜냐하면 순교 후 시신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산소가 없는 세 분의 순교자를 기리며 만들었다.
 우리 천주교인의 목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완덕(完德)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부족함이 많은 우리가 완전한 덕행을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다만 완덕을 향해 최선을 다할 뿐이고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선물로 채워주실 것이다.

 기울어진 십자가 모양은 완전한 십자가의 삶은 살지 못하지만 그에 가까이 가려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부서진 세 조각은 잃어버린 세 분의 순교자와 그분들의 산소를 뜻한다. 또한 세 조각을 오른 쪽에 둔 것은 완전한 십자가로 완성되리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김윤희 (金允熙, 1834~1868)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