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김만집 아우구스티노(1798~1841)
나의 주님 십자가

“천주교는 세상에서 말하듯 무군무부(無君無父),

 이적(夷狄), 금수(禽獸)의 종교가 아니라  천주님의 참다운 진리이오”
– 김덕심의 옥중 신앙 고백 –

Sketch Story
-주님 닮은 십자가, 나의 주님 십자가-

 두 개의 십자가가 겹쳐져 있다.
바탕이 되는 큰 십자가는 예수님 십자가이고 가운데 정사각형 십자가는 김덕심 십자가이다.

그가 “하느님은 참다운 진리요”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의 뿌리가 예수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의 신앙의 근원인 예수님 십자가를 바탕에 놓았고 그 위에 김덕심 십자가를 놓았다. 아홉 개의 구멍은 구산 순교자의 효시인 그의 삶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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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집 아우구스티노(金萬集, 1798-1841)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자는 덕심(德深) 또는 치영(致英)이고, ‘만집’은 그의 보명인데, 교회사의 기록에는 ‘덕심’이라는 자로 나온다.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만집·문집 형제와 사촌 김주집은 함께 재판관 앞에 나아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만집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주교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無君無父]· 이적(夷狄) ·금수(禽獸)의 교가 아니라 천주님의 참다운 진리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를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사령들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것과 비슷한 말만 하면 석방될 수 있다’고 회유하였지만,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주 유수는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한 겨울 내내 그대로 방치하였다

1840년에 김만집의 아들들은 부친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면서 한때 석방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도 가졌으나 그 자신은 조금도 석방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유수도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주 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만집은 장남 원희(元熙)와 차남 차희(次熙)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 장남의 나이가 14세였으니, 차남은 10세 전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끝까지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숨을 거둠으로써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