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1월 26일 연중제3주일에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
**** 이벽(세자요한)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2 - ****
권일신은 이벽의 스승 권철신의 아우요 실학자로 유명한 순암 안정복의 사위였다. 이벽보다는 열두 살이나 위였으니 학문으로 본다면 한참 선배인 셈이다. 그러나 권일신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인 후에는 이벽을 신앙의 선배처럼 생각하고 믿고 따랐던 것 같다. 복음안에서는 전통의 선후배 문제를 따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794년 겨울에 있었던 최초의 세례식에서 권일신은 이벽과 함께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 형 권철신을 인도하여 입교시켰고, 남다르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제 그의 신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장인 순암공이 절교를 선언하였을 때나 이벽이 사망한 뒤에도, 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탕 알렉산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조상 제사 금지령'을 내렸을 때도 진리를 믿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권일신은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과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의 신앙의 스승이었으며, 최초의 밀사 윤유일도 그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저 유명한 순교자 정약종 회장의 대부(代父)도 바로 권일신이었다. 그는 '명례방 사건'이 일어나자 감히 형조로 찾아가 성상(聖像)을 돌려달라고 항의한 적도 있었다. 또 1786년 이래 약 1년 동안 지속된 모방성직자제도(일명 가성직자제도) 안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내용들은 권일신의 굳은 신앙과 교회 업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하느님의 종'(聖人)으로 선정되지 않고 있다. 왜, 무엇 때문일까?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칼날 아래 죽지 못하고 유배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해박해(1791년)가 일어난 직후, 권일신은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들에 의해 천주교의 교주(敎主)로 고발되었고, 즉시 형조로 끌려가 도합 일곱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섯 번째까지도 '끝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않았다'. 혹독한 형벌 아래서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문초에서는 이렇게 답하였다. "천주교 서적에서의 가르침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정조 임금과 좌상 채제공은 남인계 인물들을 중시하고 있었고 탕평(蕩平) 정국의 일각인 그들을 되도록 구제해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남인의 많은 재사들이 천주교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에게 배교를 이끌어냄으로써 죽음을 면하도록 유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권일신이 마지막 일곱 번째의 문초에서 마음이 약해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작성일 : 200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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