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3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고난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1> **** 압록강을 넘어 북경으로 ****
1996년 우리 교구에서 시복 시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첫 번째로 선정한 순교자.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종'으로 인정받은 순교자.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밀사. 우리는 그를 "고난의 밀사"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애칭치고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가 너무나 가슴 저리다. 이 애칭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이다.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에서 태어나 양근 땅 한강개로 이주해 살던 윤유일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에는 같은 마을에 살던 권씨 형제가 있었다. 지난 호에서 이야기했던 권철신이 학문의 스승이었고, 아우 권일신이 신앙의 스승이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또 얼마나 잘 만난 스승과 제자란 말인가.
윤유일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한두 해 뒤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서른 살 때인 1789년 교회 밀사로 선발된다. 지도층 신자들이 모방성직자단(가성직자단)을 해체하고 평신도의 성사 집전이 교리에 위배되는지를 묻기 위해 북경 교회에 파견할 밀사를 구하자, 스승 권일신이 그를 밀사로 천거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초기교회 내에서 얼마나 신뢰받고 있었는지 그리고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도 출중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789년 10월, 윤유일은 하층 상인으로 위장을 하고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렬에 끼게 된다. 사신 행차만이 국경을 넘어 북경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무리 하층상인이라 할지라도 사신 행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주고 그 자리을 사야했으며 연줄도 있어야 가능했다. 이제 그는 눈보라 치는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건너 북경을 향해 힘겨운 길을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보다 더 그를 힘겹게 한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과, 옷 속에 숨긴 스승 권일신과 이승훈의 편지가 발각될까 노심초사한 일이었다. 비단에 쓰인 신자들의 편지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윤유일의 솜옷 이곳저곳에 꿰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윤유일은 북경으로 가서 남당(南堂)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Gouvea, 湯)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1789년 12월 22일(양력 1790년 2월 5일)에는 북당에서 라자로회 로(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로 세례(조선에서의 세례가 합당했었는지 의심이 되어)를 받고, 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대부는 예수회원이며 궁정화가인 판지(Panzi, 潘)수사였는데, 그는 윤유일의 모습을 그려 로마로 보냈다.
조선 신자로서는 처음 받는 견진성사였으니, 얼마나 감격이 컸을까? 구베아 주교와 중국 선교사들은 당시의 벅찬 감격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편지에 담아 고향으로 보냈다.
"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는 윤유일 바오로의 덕성과 열정을 보면서 주변에 있는 목자와 양떼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가슴 벅찬 흥분은 이후 며칠 동안 북경 신자들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 위에 내렸던 것입니다."
******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작성일 : 200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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