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3월 2일 연중 제8주일 수원교구 주보연재에 실린 글 입니다. **********************************************************
고난의 밀사 윤유일(바오로) <3>
***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 ***
1793년 말, 신부 영입에 실패한 조선교회의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다시 한번 신부 영입을 위해 지황(사바)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지황이 떠나기 며칠 전, 윤유일은 신자들을 대표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전할 편지를 작성해 나갔다. "2년 전의 신해박해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면서 보여준 기적 ('참수형을 당한 시신을 친척들이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로 적셨으며,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구베아 주교가 St. Martin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에서-)을 목격한 교우들은 북받치는 눈물 속에서 찬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 그들의 피를 적신 수건 몇 조각을 주교님에게 보내드리오니…" 그렇게 윤유일은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보여준 기적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자신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밀사 지황이 북경을 향해 역경의 여정을 시작할 무렵,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제자 신부 하나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해 놓고 있었다. 광동성 소주에서 태어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바로 그였다. 그는 구베아 주교가 설립한 북경 신학교의 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와 지황이 북경의 남당에서 만난 것은 1793년이 마지막 숨을 다해가던 때 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초, 주문모 신부와 지황은 각각 다른 길로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대인 '책문'(柵門)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그러나 주 신부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양떼들이 기다리고 있는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국경 감시가 심해진데다가 압록강의 얼음마저 녹고 있었으며, 설령 배를 구한다고 해도 도강하기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의주에서 지황을 기다리고 있던 윤유일과 동료들의 실망이란… 주님의 섭리를 기대하면서 그들은 다시 서울로 가서 겨울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때 이미 최인길(마티아)은 서울의 북산(북악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계동 마을 안쪽에 집 한 채를 마련해 놓고 있었는데, 목자를 모시기 위한 집이었다. 1794년 겨울, 또다시 윤유일과 동료들은 서울을 떠나 의주로 출발하였다. 그런 다음 지황은 주문모 신부를 영접하러 책문으로 떠나고, 나머지 동료들은 의주 객주에서 목자를 기다렸다. 드디어 12월 3일(양력 12월 24일), 그 해의 성탄 전야. 마침내 주문모 신부는 지황과 함께 의주성의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입국한 뒤, 꽁꽁 얼어붙은 조선 땅에 친구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이루어진 주문모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감격적인 만남! 그들은 걸어서 12일 만에 서울 계동의 은거지에 도착하게 된다. 성사의 은총을 얻게 된 조선 교우들의 그날의 기쁨이야...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쁨인가! 어떤 글과 말로 표현하겠는가! 무엇과 바꾸겠는가! 이 기쁨이 영원히 조선교회에 머물며 함께 하길 바라고 또 바랬지만 이것은 또 다른 수난의 시작이었다.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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