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3월 30일 사순 제4주일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아가타) <2>
**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다 **
윤점혜(아가타)가 종적을 감추어 버린 날부터 가족들은 근심에 빠졌다. 게다가 뒷산에서 발견된 그녀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니, 그녀가 호환(虎患)을 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그러나 가족들의 걱정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 후 윤점혜(아가타)가 다시 가족들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몹시 걱정할 것을 예상한 사촌 오라버니 윤유일(바오로)이 윤점혜(아가타)를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가족과 친척들이 윤점혜(아가타)를 크게 꾸짖었지만, 정결을 지키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 어머니 이씨만은 이러한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고 갖은 질책으로부터 그녀를 보듬어 주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점혜(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머리에 쪽을 찌고, 혼인한 적이 있는 과부처럼 행세하면서 동정을 지켜나갔다.
그로부터 2년 뒤, 윤점혜(아가타)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까지 받는 은총을 누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점혜(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켰으며, 극기 생활과 성서 읽기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고, 아가타 성녀와 같이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당시 윤점혜(아가타)가 열심히 연도를 바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는데, 이 내용은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수록되어 있다.
'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아가타의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이 있었답니다. 어머니가 임종시에 성사를 받지 못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아가타는 어머니가 성모님 곁에서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나중에 주 신부님에게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더니, 신부님께서는 ‘그 꿈이 사실이라면 열심히 연도를 바치는 것이 좋겠다’ 고 말씀하셨고, 이에 따라 아가타는 열심히 연도를 바쳤습니다.'
또 윤점혜(아가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묵상 체험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어느날 아가타가 묵상을 하고 있는데, 성모님의 가슴 위로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가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믿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신부님께서는 "이는 실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모양의 상본이 있는데 한 번 보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아가타가 그 상본을 보니, 정말로 자신이 묵상 중에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이후로 윤점혜(아가타)는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분의 고통에 동참해야 하겠다는 순교 원의 또한 더욱 굳어져가게 된다.
<계속>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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