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4월 6일 사순제 5주일 수원교구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아가타) <3>
*** 순교와 기적 ***
그 무렵 윤점혜(아가타)의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여주 출신의 열심한 교우 정광수(바르나바)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비신자였던 시부모 때문에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윤운혜(루치아)는 남편과 상의한 뒤, 한양의 벽동에 집을 구해 함께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윤점혜(아가타)는 동생 부부가 한양으로 올라오자 자주 그 집을 왕래하면서 교회 일을 도울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실제로 윤운혜(루치아)와 정광수(바르나바) 부부는 자기 집 마당 한켠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었다. 이들 부부의 집은 한국 최초의 성물 보급소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채 2년이 가지 못하였다. 1801년 초 신유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윤점혜(아가타)는 함께 생활하던 강 골롬바 회장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생 윤운혜(루치아)도 그 뒤를 따랐다.
윤운혜(루치아)는 이후 신앙을 굳게 증거하고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한편 루치아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는 박해 초기에 한양을 떠나 지방으로 피신할 기회를 얻었으나 후에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갖은 형벌을 극복한 뒤 12월 26일 고향 여주에서 순교하였다.
윤점혜(아가타)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동시에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형조에서 있은 최후 진술에서 아가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0년 동안이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으로 그 진리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결코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형조의 판결에 따라 윤점혜(아가타)는 곧 양근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훗날 감옥에서 나오게 된 그녀는 주변 교우들에게 이렇게 증언해 주었다고 한다.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나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아주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습니다.”
윤점혜(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양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였다. 그때 이 순교의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기이한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휘광이의 칼날이 아가타의 목을 베자, 그 자리에서는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의 피가 흘렀습니다.”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정확하게 이틀 전 윤점혜(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한양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동정녀 문영인(비비안나)의 목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었다.
아! 보배로운 피. 천상의 영예로운 보관(寶冠)이 동정 순교자의 머리에 씌워지는 순간이었다.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