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양근 땅 최초의 순교자 윤유오(야고보)
*** 동강난 글에서 찾아낸 순교 행적 ***
우리의 순교자 중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세례명이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아쉽게도 '하느님의 종'에서 누락된 순교자들도 많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조각난 순교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비록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만, 순교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해 주 고 있는 주옥과 같은 글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동강난 글들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밀사 윤유일(바오로)의 아우요 양근(지금의 양평) 땅 최초의 순교자 윤유오(야고보)의 순교 행적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동강난 글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제 그 조각들을 모아보기로 하자.
윤유오(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 2리)에서 태어나 인근에있는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형이 가르쳐 주는 신앙의 젖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1795년의 박해로 형 윤유일(바오로)이 순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윤유오(야고보)는 결코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서로 신심을 북돋워 주었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슴지 않고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았다.
이제 윤유오(야고보)는 박해자들로부터 양근 땅의 교회 우두머리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어지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
그러나 윤유오(야고보)는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다.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는 형 바오로가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혀왔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버리겠다는 생각은 진실로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관장은 윤유오(야고보)의 마음을 돌림으로써 많은 백성들에게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윤유오(야고보)는 끝까지 진리의 가르침에서 등을 돌리지 않았고, 이를 알게 된 관장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휘광이의 칼날을 받아야만 했다.
이때 윤유오(야고보)와 함께 신앙을 증거하고 천상의 영광을 얻은 교우가 한 명 있었다. 그 이름은 '유한숙'. 그러나 아쉽게도 생전의 행적과 세례명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천상의 순교록에는 분명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 그 달에만 해도 양근에서는 모두 13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이는 윤유오(야고보)와 유한숙 뿐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순교자의 이름은 잊혀졌지만, 이 무명 순교자들의 용맹한 신앙심은 지역 교우들의 입과 귀를 통해 전승으로 내려오고 있다.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교우들은 여전히 그들을 존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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