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4월 20일 부활대축일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 내가 만난 할머니와 같은 교구 신자분들! >
*** 할머니의 미숫가루에는 생명이 있다 ***
수원교구 주보 제1000호 발간을 축하하며 어떤 글을 쓸까 고민 고민하는데 살며시 떠오르는 분이 있다. 재작년의 일이었다. 그해 7,8월은 매주 월요일마다 경기도 역사지를 집중적으로 답사했었다. 7월 9일에는 <안성>지역을 답사했는데, 그 날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에 있는 선조16년(1583년) 무과에 장원급제한 <오정방>의 고택이었다. 한참 동안을 <오정방 고택> 주변을 돌아보던 중, 고택 옆 텃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다.
답사도 어느 정도 마쳤고 해서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답사 중에 그 지역 사람과 담소를 나누는 것은 답사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사실 나는 이것을 답사의 백미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만 내가 가톨릭 신부라는 것이 발각(?)되었다. 나는 답사를 갈 때 요란하게(?) 하고 간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침반을 목에 걸고, 고도계가 있는 시계를 차고, 옷은 자유롭고 간편하게 입는다. 그래서 웬만하면 신부라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르는데 이번엔 들키고 말았다.
할머니는 내 말투와 몸에서 신부의 냄새를 맡고는 내가 진짜 신부인지 서서히 확인 심문(?)을 시작한다. “우리 성당의 신부님은 누구이신데 그 신부님 아세요? ", “우리 성당은 이런데 아세요?” 등 많은 질문을 하신다. 내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물음에 척척 대답하니. ‘음! 틀림없이 신부님이시군’ 하며 속엣 말을 하시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신부임을 자백(?)하니까 시원하신가보다.
이렇게 만난 것도 큰 인연인데 집에 가서 미숫가루 한 잔 하자고 권하신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 가서 시원하게 한 잔하는데 사건은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우리 일행에게 미숫가루를 대접하면서 “내가 오늘 예수님 만나서 너무 기뻐”하시며 연신 방긋방긋이시다.
내가 “오히려 제가 예수님 만났는걸요. 이 더위에 시원하게 냉차를 얻어 마셨으니까요. 감사해요 할머니.” 할머니는 질색을 하시며 “무슨소리! 내가 신부님 만났으니께 내가 예수님 만나째” 그러시면서 냉차를 한잔 더 주신다.
주전자를 잡으신 할머니 손등의 주름에는 그간의 삶이 배어있다. 옛날을 떠오르게 하는 정겨운 노란 주전자에 있는 음료수를 따르며 성서의 “사마리아 여인”을 이야기 하시는데 좔좔좔... 내용을 꿰차고 계신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을 이 별난 신부와 당신과의 만남으로 비유하신다.
참으로 놀랍고, 이 기쁨 형언할 수 없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미숫가루를 사마리아 여인의 ‘생명의 물’에 비유하시는 데에, 난 뒤로 벌렁 넘어졌다. 아! 이런 분이 계시기에 교회는 살아있구나. 할머니의 미숫가루에는 생명이 있다. 모든 사물을 예수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보고 계신 할머니.. 할머니와 사진도 한 장 박았다.
할머니와의 만남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대부분의 시골집 대문에 들어서면 옆에는 아궁이가 있는데 보통 사랑방에 불을 넣고 소여물을 쑤는 곳이다. 그 곳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시골에서 이곳은 정말 요긴하게 쓰이는 공간이다.
더욱이 여름에는 이곳이 최고다. 시골 사람들에게는 피서지이기도 한데, 그곳에 멍석을 깔고 앉아 삶은 옥수수를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할머니에게서 옛날이야기도 들으면서 꿈과 희망을 키우는 곳이다. 또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푸는 곳이기도 하다.
대문에 막 들어선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할머니집 그 문간에 멍석이 펴져 있었는데 멍석위에는 자그마한 밥상을 책상삼아 성서가 올려져 있었고 그 성서는 얼마나 자주 보셨는지 온통 손때가 묻어 있었다. 마음이 찡했다. 너무 감사했고, 할머니의 충실하고 열정적인 신앙심을 단번에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펴져 있는 곳의 성서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니 이 또한 줄줄줄...이었다. 감동 그 자체다. “할머니! 부탁이 있는데요” 했더니 “뭔데요 신부님!”하신다. “성서를 읽으시는 모습을 사진 한 장 찍을께요” 했더니 이번에는 몸단장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괜찮으니까 그냥 찍자고 했더니 소녀처럼 수줍어하신다.
지금도 나는 성서를 볼 때면 가끔 그 할머니의 모습이 마음에 떠오른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많은 우리 수원교구의 신자분들. 아마도 한 분 한 분이 이런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들이리라. 그리고 내가 만나게 될 모든 신자분들도 이 할머니와 같은 분들이시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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