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답사기
구 홈페이지에 2009년까지 게재된 정종득 바오로 신부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중단되어 있습니다.
제목여주 지방의 선각자 ! 崔昌周 ...............(수주연 23)2021-04-21 04:1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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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6월 8일 성령강림대축일에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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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순교자들의 이야기 : 최창주 마르첼리노 ①

                      *** 여주 지방의 선각자 !  崔昌周  ***


  현대사회는 문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번 사제연수 중 쉬는 시간에 신부님들과 대화를 갖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송병선 신부님은, 21C의 가톨릭은 복음 안에서 교육, 문화, 복지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수원교구의 가톨릭문화는 무엇인가?”하며 여운을 남기셨다. 교회의 비젼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라고 느꼈다.  

  그렇다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각 지방은 특히 자기 지역의 문화홍보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 요즘 주보에 여주순교자들에 대해 연재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주군은 무엇으로 자기 지방을 알리고 있는가? 

  찾아보니 여주지방은 “역사와 문화, 관광의 고장인 여주”, “옛부터 시 
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아름다운 여주”, “옛 성현들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여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이뿐 아니라 여주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주지방의 천주교 위상일 것이다. 여주는 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을 배출하였고, 피로써 진리를 증거 한 터가 있으며 부엉골의 신학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이것이 여주지방의 또 다른 자랑거리이며 힘이다. 이처럼 여주가 천주교의 문화적 가치의 위상이 클 수 있도록 기반이 되게 한 이는 최창주(마르첼리노)이다.  

  여주 땅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여주지방의 복음의 선구자가 된 최창주(마르첼리노) 순교자는 어떤 사람인가?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여종’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그는 40대 초반에 우연히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다음 온 가족을 차례로 입교시켰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생활은 점차 이웃과 친지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하였고, 1791년의 신해박해 때는 천주교 신자로 밀고 되어 광주 옥에 갇히게도 되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신앙은 아직 순교에 이를 정도로 굳지는 못하였다.  

  광주 감옥에서 석방된 최창주(마르첼리노)는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한 신앙심과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치고,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 순교의 은총을 입어 피로써 죄를 씻어 낼 방도를 구하는 데만 노력하였다. 

  또 가족과 이웃들에게 더욱 열심히 신앙을 권면하였으며, 두 딸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그 딸들 중 하나는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요한)와 혼인하였고 다른 딸 최조이(바르바라)는 경기도 용인 태생이며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혼인했다. 

  기록에 의하면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며 신태보(베드로)의 며느리인 최조이(바르바라)의 신심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곳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다음 기회에 최조이에 대해 쓰기로 하겠다.) 

  앞서 여러 차례 설명한 것과 같이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었는데, 이때 최창주(마르첼리노)의 사위 원경도(요한)도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창주의 아내는 남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그는 웃으면서 “안심하오. 내가 없더라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을거요”하며 순교의 원의를 비추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까지 피신을 종용하므로 이미 순교하기로 결심한 최창주(마르첼리노)였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원의를 저버릴 수가 없어 한양으로 피신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그는 ‘순교의 은총을 받아야만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잠시 잊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인자하신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최창주(마르첼리노)를 일깨워 주고 계셨다.  그가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순교를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문득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왜 한양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왜 은총의 순간을 피해 가는 것일까.’ 전율이 온몸을 엄습해 오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던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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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형벌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형벌제도 가운데서도 가장 극한 형벌이다. 이러한 사형의 종류는 크게 참수형(참형= 신수이처-身首異處-라 하여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과 교수형(교형=목을 졸라서 죽이는 형벌)이 있는데 시대와 국가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럼 <참수치명>은 무엇인가? 
참수형(참형)을 받아 순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참수치명(斬首致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흔히 “어느 순교자가 참수 당했다”라고 한다. 참수형은 조선시대 사형방법의 하나로 대개 손발을 결박한 후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받치고 목을 베는 형벌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이 형을 받아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