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답사기
구 홈페이지에 2009년까지 게재된 정종득 바오로 신부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중단되어 있습니다.
제목대군(大君), 대부(大父)이신 주님! 영원히..(수주연24)2021-04-21 04:1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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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6월 15일 삼위일체 대축일, 수원교구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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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순교자들의 이야기 : 최창주 마르첼리노 ②

            *** 대군(大君),대부(大父)이신 주님! 영원히...*** 


  박해를 피하려고 한양으로 가던 최장주(마르첼리노)는 마음을 다시 잡고 가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최창주(마르첼리노)를 본 그의 아내는 적지 않게 놀랐으나, 더 이상 남편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하지는 못하였다. 

  그때까지 여주에 머물면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행방을 찾던 포졸들은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들이닥쳤다. 그리고 최창주를 체포하여 ‘사학쟁이의 우두머리를 잡았다’고 외치면서 의기양양하게 여주 감옥으로 향하였다. 

  여주 감옥에서는 이미 앞서 잡혀온 그의 사위 원경도(요한)와 이중배(마르티노) 등이 그를 맞이하였다. 

  이튿날부터 문초가 시작되었는데, 여주 관장은 최창주(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누구 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는지, 또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 
다.”라고 대답하면서 밀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형벌을 받을 때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아주 자랑스럽고 거룩하게 부르면서 꿋꿋하게 견디어냈다. 

  최창주(마르첼리노)의 옥중 생활은 이후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서로 의지하면서 순교를 향해 나가자고 격려하였으며, 때론 마음이 약해진 교우에게는 교리를 강론하여 용기를 불어넣어 주곤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 10월에 경기감영으로 압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오롯이 천주께 향한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는 형벌로 인해 온몸이 헤어진 사위 원경도(요한)의 몸이 기적처럼 낫는 광경을 보면서, 또 이중배(마르티노)의 굳은 신앙과 예비 신자 조용삼(베드로)이 보여준 용기를 통해서 더욱 신앙적으로 굳세어져 갔다.   

  1801년에 들어서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배교의 말 한마디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겠다며 처음엔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설득시키려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때 최창주(마르첼리노)는 함께 있는 교우들을 대표하여 감사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큰 임금이시며 큰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어찌 저희들이 그분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죽기를 원합니다.” 

  형벌이 점점 더 가혹해졌다. 피가 튀고 살이 너덜거렸으며, 배교하고 목숨을 건지라는 유혹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창주(마르첼리노)는 동료들과 함께 이를 굳세게 뿌리치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경기 감사는 사학쟁이들에게 자신이 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래, 이놈들은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이란 말인가?’마침내 감사는 최창주와 동료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최후 진술 후 최창주(마르첼리노)는 자신의 제헌(祭獻)이 완전히 이루 
어질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어 나갈 은총을 얻기 위하여 기도와 모든 본분을 실천하는 데에 열심을 배가하였다. 

  경기 감사가 조정에 보고한 최창주(마르첼리노)에 대한 진술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후 진술 가운데서도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단언하였습니다. ]

  그러자 조정에서는 사학쟁이들을 모두 고향 여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최창주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게 되었으니, 그 장소는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였다. 순교 날짜는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나이는 5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