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답사기
구 홈페이지에 2009년까지 게재된 정종득 바오로 신부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중단되어 있습니다.
제목함도 못받고 올린 혼인식 ......................(수주연25)2021-04-21 04:1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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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6월 22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저의 졸필이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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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순교자들의 이야기 : 정광수·윤운혜 부부 ①


                        ***  함도 못받고 올린 혼인식 ***  


  난 이 글을 쓰면서 이 세상 모든 부부들이 정광수·윤운혜 부부처럼 살고 있으리라 믿으며,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가난하면서도 소박한 부부의 사랑을 키우며,  항상 주님을 가장 윗자리에 모시고 살았던 부부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들 부부의 삶을 엿보기로 하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고도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경기도 양근의 대감마을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는 아주 조촐한 혼례식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혼례당사자는 여주 가마골 (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정광수(바르나바)와 한감개의 윤운혜(루치아)였다. 조선중기부터  정착된 전통의 ‘친영(親迎)’ 예절에 따라 가마골의 정광수가 새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해 가기 위해 먼저 신부집에 와서 혼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정광수(바르나바)와 윤운혜(루치아)의 부모는 이미 오래 전에 둘의 혼인을 허락하고 편지를 주고받은 상태였다. 또 신랑의 사주를 신부 집에 보내는 ‘납채’, 신부 집에서 혼례 날짜를 적어 신랑 집에 보내는 ‘연길’이 모두 끝나고, 신랑 집에서는 신랑의 의복 치수를 적은 ‘의제장’을  
이미 신부 집에 보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비신자였던 정광수의 부모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 
었던 것이다. 양근의 새 신부가 천주학쟁이라는 것이 아닌가!  

  결국 정광수의 부모는 혼서(婚書)와 채단을 담은 ‘납폐함’ 즉 함(函)을 신부 집에 보내지 않았다. 이처럼 딸이 혼서도 받지 못하고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윤운혜의 어머니 이씨 부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돈 내외, 게다가 신앙을 증오하는 사돈 내외에 대한 의구심, 그러한 집으로 귀여운 딸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불안함에 이씨 부인은 그날 내내 눈물을 훔쳐야만 하였다. 

  혼서가 없는 혼례. 지금과 같이 자유롭게 혼인할 수도 없는 당시로서는, 더욱이 양반 집안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오직 신앙의 힘 때문에 가능한 결혼이었다. 

  그러니 신랑 집으로 가는 신행길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사모와 자색 단령, 족두리와 원삼, 말과 꽃가마가 가당키나 하였을까?  

  한감개에서 첫날밤을 지낸 윤운혜(루치아)는 정광수(바르나바)를 따라 친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편의 고향 여주 가마골로 가서 시집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들의 신혼 생활은 쉽지 않았다. 비신자인 시부모들은 윤운혜에게 온갖 미신 행위를 강요하였고, 그때마다 그녀의 신앙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운혜는 온갖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남편 정광수와 함께 하는 기도 생활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  

  사실 윤운혜(루치아)가 혼례식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에는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의 신앙이 있었다. 그녀는 오직 이 하나만을 의지했고,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나가기로 남편과 굳게 약속했었던 것이다. 

  정광수(바르나바)는 어떤 분인가? 여주 가마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791년 한감개에 살고 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함으로써 마침내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정광수(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진리에 상당한 감명을 받고 신앙생활에 깊이 젖어들었다.  또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한양으로 올라가 주신부에게 직접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런 다음 주신부의 명에 따라 여주 김건순(요사팟)과 동료들을 입교시키는 중개자 역할을 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정광수는 부모나 여동생 정순매에게도 자주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이해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전통을 고수하는 부모들은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갖은 방법과 유혹을 다하여 천주교로부터 아들을 떼어놓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운혜(루치아)가 정광수(바르나바)와 혼인하였으니, 며느리에 대한 시부모들의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