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답사기
구 홈페이지에 2009년까지 게재된 정종득 바오로 신부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중단되어 있습니다.
제목그 무엇이 나를 천주사랑에서 .........(수주연44)2021-04-21 04:2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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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9일  연중 제 32주일.    
                저의 졸필을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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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엇이 나를 천주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  이현(李鉉) 안토니오  ***


  우리는 언젠가 교회 성화가(聖畵家)로 잘 알려진 이희영(루가)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희영은 이현의 숙부이며, 여주 양반 김건순(요사팟)의 칠촌 외숙으로, 너무 가난하여 10년 동안 김건순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김건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고, 이 복음이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조카 이현에게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안토니오)은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에 교회 서적을 접할 기회를 얻어 이미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숙부 이희영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김건순의 집을 왕래하다가 1797년 가을부터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건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서울 신자들과 주문모(야고보)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이현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날 이현(안토니오)은 문득 ‘천주교의 교리는 우리를 구원해 줄 진리의 가르침에 틀림없다.  이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여 진정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올라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아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에 그는 서울로 올라가 홍필주(필립보)의 집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가  받은 세례명은 ‘안돈’(安頓:안토니오의 한자식 표기) 이었는데, 이를 어떤 책에서는 ‘야고보’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현(안토니오)은 이때부터 정광수(바르나바), 최필제(베드로), 김종교(프란치스코) 등과 교류 하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신자들의 소공동체 기도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현은 교우인 홍익만(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0년 겨울에  양친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이현(안토니오)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이에 앞서 그의 숙부인 이희영도 여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그런 다음 3월 17일(음력)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의금부의 문초 과정에서 이희영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저는 이제 천주 사학(邪學)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형조로 이송된 이현(안토니오)은 포도청에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렸던 잘못을 스스로 깊게 뉘우쳤다.  

  ‘아 ! 내가 무엇을 얻고자 하여 그런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는 말인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제 박해자들은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형벌을 이겨냄으로써 포도청에서 지은 죄를 스스로 기워 갚아 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이현(안토니오)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거룩한 피를 흘렸으니, 때는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저는 4년 전부터 동료들과 함께 교회서적을 읽으면서 여기에 깊이 빠졌습니다. 여러 해 동안 천주교에 빠져 이를 믿어 왔으니, 이제는 아무리 형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천주를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구산 성지 정종득(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