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주님 공현 대축일부터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되는 <'선조순교자들의 신앙'>편을 뒤늦게 나마 올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저희 홈페이지의 답사기란을 통해 우리 신앙 선조들이 보여주신 참된 신앙이 조금이라도 오늘의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좋겠습니다.
************************************************ [2003년 1월 5일 주님공현대축일]에 연재한 글입니다. *************************************************
우리는 "순교 선조들이 우리 신앙의 뿌리요 이 교회의 맥"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곤 한다. 필자 역시 그랬다. 그러나 "나 자신이 과연 얼마나 신앙 선조에 대해 알고 있는가?하고 자문해 보자. 스스로 말문이 막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순교 선조들의 신앙]이라는 난을 고민 끝에 맡기로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기회를 통해 나 자신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어 온 우의 신앙 선조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시작하면서 아울러 당부를 드리고 싶다. 우리 모두 이 기회를 통해 함께 교구 신앙의 맥을 짚어보기로 하자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의 역사는 기묘한 과정을 통해 시작되고, 순교를 통해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어 왔다. 그리고 그 열매는 박해자의 칼날 아래에서도 다시 신앙의 싹을 틔우는 일을 계속하면서 꾸준히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간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도 바로 그 산물이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수원교구의 사목 관할 지역인 한수(漢水) 이남의 경기지역이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였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지금의 양평 지역은 교회창설과 동시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곳에 뿌리를 내린 복음의 새싹은 그 인근의 광주와 여주 지역으로 다시 씨앗을 틔워 갔으며, 남한강 줄기를 따라 충청도 충주 지역으로까지 번졌다. 충청도의 내포 지역과 전라도 지역의 복음도 이곳에서 그 불씨를 가져갔다. 그러니 경기도의 신앙 공동체에서 첫 순교자들이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순교자들의 탄생은 1795년 을묘박해를 시작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초기의 공동체는 와해되고, 교우들은 곳곳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귀양을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박해자들의 의도와 다른 방향에서 결정되는 법이다. 순교자들이 뿌린 피는 후손들에 의해 교우촌 건설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 교우촌을 바탕으로 신앙의 터전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박해와 순교자의 탄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말처럼 그것은 "아! 보배로운 피"의 연속이었다.
수원교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200여녕의 복음사를 간직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좋으신 하느님의 보호 아래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순교 선조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자리를 얻게 된 것은 아주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순교 선조가 우리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어 왔다면, 미래의 교회사 또한 그 돌을 주추로 삼아 섭리 안에서 진행되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작성일 : 2003-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