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2월 23일 연중 제7주일 주보 연재에 실린 글입니다. ********************************************************
고난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 <2> *** 끊임없는 성직자 영입***
중국 북경으로 가는 길. 윤유일에게 있어 그 길은 가슴 벅차면서도 위험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양에서 북경까지의 길은 어림잡아 3천여 리. 실제로는 왕복 7천리가 족히 되는 거리이다. 한겨울의 벌판 노숙,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길과 고개. 발은 수없이 부르텄고 노숙에서 오는 한기는 언제나 밀사를 괴롭혔다.
어디 이뿐이랴. 의주 변문에서의 검색은 또 얼마나 삼엄한가. 그리고 관문 검색시, 걸리는 자는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곤장에서부터 유배, 심지어 참수형에 까지 처해 질 수도 있었다. 더욱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닥쳐올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러한 길을 우리의 밀사는 두 차례나 왕복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굳은 신앙과 밀사로서의 책임감을 지닌 윤유일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두 번째로 북경에 가게 되는 때는 1790년 5월, 북경에서 돌아온지 2개월 후였다. 이번에는 그의 어깨에 '선교사 영입'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메어졌던 것이다. 윤유일이 두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 구베아 주교는 그에게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와 밀사가 만날 시기, 방법과 장소 등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제사 금지령'이 담긴 사목서한과 성작, 미사 경본, 성석(聖石), 포도나무 묘목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사주를 마련하기 위해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는 법과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어 있었다. 1791년 초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와 약속한 대로 다시 중국과의 국경 지역으로 갔지만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아쉬움을 안고 조선으로 되돌아온 윤유일을 기다리는 것은 박해뿐이었다. '제사 금지령'에 의한 제사 폐지 문제로 야기된 신해박해(辛亥迫害,1791 정조15)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교자들의 탄생. 신해박해로 인해 1791년 말부터 1793년 말까지 2년 동안 북경교회와 조선 교회의 연락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단절이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영신적인 구원을 갈망하던 조선 교우들이었기에 절대로 성직자 영입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해가 끝나자마자 총회장 최창현, 여성 지도자 강완숙, 전라도의 유항검, 한때 마음이 약해졌다가 다시 교회 품을 찾은 최필공 등 지도층 신자들은 다시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밀사 윤유일은 바로 이 시기에 최인길(마티아)과 지황(사바)을 동료로 맞이하였으니, 그들은 이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한마음 한 뜻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교우이자 동료요 형제였다. 그들의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 그러니 어찌 이 선조들의 생애를 따로 떼어 이야기할 수 있으랴! 최인길은 누구인가? 서울의 역관(통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고, 온 집안 식구를 신앙으로 인도한 선구자였다. 또 지황은 누구인가? 서울의 궁중악사 집안에서 태어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스스로 교우들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신입 교우였다. 윤유일과 함께 이 두 분은 성직자 영입과 교회재건을 위해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인 것이다.
뜨거운 땀방울과 기도로 이어진 윤유일의 먼나먼, 이역만리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에 항상 주님의 보호와 은총이 가득했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