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주보에 연재된 글입니다. **********************************************************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아가타) <1>
*** 전통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
목자가 없던 교회 창설기의 신자들은 교회 서적을 통해 신앙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의 필요한 부분만을 취합하여 한글로 번역한 『성경직해광익』은 성서 본문과 주해·잠·의행지덕·당무지구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신약 4복음서의 주요 내용을 연중 주일과 축일에 맞추어 수록하고 해설을 붙인 것으로 당시의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사람의 정덕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동정(童貞)을 지키는 것이 상층이요, 홀아비나 과부가 되어 독신의 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음이며, 배필의 정을 지키는 사람이 그 다음이다. 성현들께서는 동정을 금에 비교하고, 나머지를 각각 은과 구리에 비유하였다. "
정결은 이처럼 신앙생활 안에서도 지고지순한 덕으로 여겨졌다. 살아서 정결을 지키는 것은 곧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을 함양하는 것이었고, 장차 순교의 용덕을 얻는 즉 종말론적(終末論的) 영성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다.
윤점혜(아가타)는 순교할 때까지 정결을 지킨 최초의 신자 가운데 하나였다. 1776년경에 경기도에서 태어난 아가타는 훗날 양근의 한감개로 이주해 살았으며, 일찍이 동생 윤운혜(루치아)와 함께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최초의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1801년의 양근 순교자 윤유오(야고보) 형제는 바로 그녀의 사촌이다. 또 아가타의 부친 윤관주(일명 ‘윤선’ 안드레아)도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온 가족이 함께 가정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윤점혜(아가타)는 일찍이 동정생활을 결심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교회 서적을 읽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 분명했으며 당시 조선 교우들 사이에 널리 읽혀진 동정 성인들의 전기도 그녀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가족과 친척들의 반대가 심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언제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박해시대의 교회사에서 마음먹은 대로 정결을 지키지 못한 예를 수 없이 볼 수 있다. 가족의 반대로 정결을 지키려는 결심을 버린 이야기, 납치를 당해 원하지 않던 남자와 혼인해야만 했던 애달픈 이야기, 총각 교우의 꼬임에 빠진 동정녀의 이야기도 있다.
윤점혜(아가타)는 이러한 어려움을 타고난 슬기로 잘 극복하였는데, 그가 동정의 결심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처음으로 생각해 낸 꾀는 이러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아가타의 나이가 차자 장차 혼숫감으로 쓰려고 얼마간의 옷감을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아가타는 이 옷감으로 남장(男裝)을 지어 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머니조차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가타는 마침내 그 동안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몰래 남장을 하고 집을 나가 사촌 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입던 옷은 동물의 피를 묻혀 뒷산 나무에 걸어놓았다. <계속>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