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답사기
구 홈페이지에 2009년까지 게재된 정종득 바오로 신부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중단되어 있습니다.
제목천주위해 고향을 떠나다....................(수주연32)2021-04-21 04:16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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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 
                                저의 졸필을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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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덕운 토마스 ①

                                      *** 천주위해 고향을 떠나다. ***


  천주교 신자들은 사학쟁이가 되어 서문으로 끌려들어 왔다가 동문 밖으로 끌려나가 목이 잘렸다. 

  또 옥졸들은 옥안에서 순교한 이들의 시신을 남한산성 동문 옆의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끌어내 밖에 내던져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수구문을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렀다. 

  ‘살아서는 서문, 죽어서는 동문’이라는 구절은 순교터 남한산성을 한 마디로 잘 설명해 준다. 

  남한산성의 행정 구역명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성곽(둘레 약 20리)은 선조 28년(1595년)에 처음 축조되었고, 광해군과 인조 초기에는 팔도의 승병을 동원하여 성곽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된다. 

  또 인조 4년(1626년)에는 현재와 같이 산성안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동시에 광주의 치소도 산성 안으로 옮겨졌다. 당시 광주의 관 
장은 ‘유수’(종2품)였으나, 4년 뒤에는 관찰사와 동격인 ‘부윤’이 파견되었다가 정조 19년(1795년)에는 다시 유수가 파견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의 결과로 인조가 청나라에 굴복하여 굴욕적인 맹약을 맺는 굴절의 역사를 지켜보아야만 하였다. 

  이제 박해가 시작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되는데, 광주 관장의 치소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는 포졸과 군사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오도록 한 뒤 형벌을 가하거나 처형하곤 했다. 

  이미 설명했던 것처럼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최창주(마르첼리노)가 혹독한 형벌을 받고 석방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순교자 자리를 한덕운에게 내주고 훗날 여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면 이 순교의 역사에서 첫 번째 모퉁이 돌이 된 이는 누구인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신유박해의 순교자 한덕운(토마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토마스)은 1790년 10월경 우연히 전라도 진산 땅에 살던 윤지충(바오로)을 만나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신앙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신앙의 스승 윤지충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한덕운은 외롭게 신앙생활을 해나가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자연스럽게 ‘스승을 따르겠다’는 순교 원의를 굳혀가게 되었다. 

  1795년경 한덕운(토마스)은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내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으며 또 성사의 은총을 받아야 겠다는 소망은 불처럼 타올랐다. 

  “그래! 서울로 올라가 직접 신부님을 뵈어야 하겠다.” 그러나 그는 주문모 신부를 만날 수 없었다. 상경하여 신부님이 계신 곳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 해 여름에 일어난 을묘박해 이후 지도층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비밀에 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온 한덕운(토마스)은 의기소침하였다. 그러나 결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자기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밀리에 생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에 1800년 10월 고향을 떠난다. 

  이때 한덕운(토마스)이 찾은 곳이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산간 마을이었다. 서울과 가까운 곳이므로 교회 소식을 더 쉽게 접할 수 있고, 언젠가는 주문모 신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의일리의 청계산 자락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한덕운(토마스)의 모습은 가난한 농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무도 그를 사학쟁이로 보지는 않았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 계속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