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9월 9일 연중 제23주일 , 저의 졸필을 수원교구 주보에 연재한 글입니다. ***************************************************************
<명도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 ②>
*** 이해와 실천에 철저했던 지도자 ***
1791년 천주교 신자들의 제사폐지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무렵,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두 번째 아내인 유조이와 맏아들 정철상(가롤로)을 데리고 마재를 떠나 양근 분원(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새 집을 사서 이주하였다.
본가에 있으면서 조상제사나 각종 미신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고, 계속하여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교리를 연구하는 데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으며, 교우들을 불러 함께 생활하면서 언제나 기도 모임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사회에서 천대받는 소외 계층들에게 관심을 갖고 교리를 가르쳐 주면서 다독거려 주었으니, 그 집 행랑채에 살던 충청도 홍주의 백정 출신인 황일광(시몬), 천민 출신 최기인, 머슴 임대인(토마스), 김한빈 등이 그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분원에는 기도 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실천해 가는 소공동체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분원 이주 후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아내와 금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였다. 교회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 교회에서는 동정의 정덕이 제일이요, 환과(홀아비나 과부)의 정덕이 그 두 번째요, 부부 사이의 정덕이 세 번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교리실천에 엄격하였던 그가 어찌 이러한 가르침을 등한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끈질긴 만류에 정약종은 1795년에 가서 둘째 아들 정하상을, 그보다 2년 뒤에 딸 정정혜를 얻게 된다.
1794년 무렵부터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 말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야고보) 신부도 이러한 그의 활동과 깊은 신심, 심오한 교리 이해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정약종의 일상생활은 이제 교리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지적인 태도, 이를 바탕으로 한 교우들과의 강론과 교리 전수 활동, 끊임없는 묵상 공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조카 황사영(알렉시오)은 훗날 그의 교리 지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찬탄해 마지않았다.
“아우구스티노(정약종)는 사람들이 별별 교리를 물어 보아도 주머니 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과 같이 번거롭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 술술 풀려 나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되풀이하여 어려운 문제를 변별하면서 조금도 막히는 적이 없었습니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모든 교우들이 존경하였다. 총회장 최창현(요한)조차도 그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었다.
1799년 초, 주문모 신부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평신도 단체를 본떠서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박해의 위협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없어도 이 가련한 교회가 끈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기존의 여러 소공동체 모임들을 조직화·체계화 해 나갈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누구를 초대 회장으로 선택할 것인가? 열심한 교우가 너무나 많았다. 누구에게 맡겨도 명도회를 훌륭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며칠을 고심하던 주 신부는 마침내 단안(斷案)을 내린다. 그 적임자는 역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이었다.
초대 명도회장으로 임명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는 교리 연구 모임을 주도하거나 회원들의 전교 활동을 독려하는 데 노력하였고, 정해진 때에 맞추어 회원들의 신공(神功) 성과를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들이 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호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릴 격랑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정약종은 누구보다 먼저 그 격랑에 휩쓸리게 되었다.
구산 성지지기 정종득(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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