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답사기
구 홈페이지에 2009년까지 게재된 정종득 바오로 신부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현재 중단되어 있습니다.
제목하느님의 훈장 !2021-04-21 04:25
작성자 Level 10

수능생들과의 도보순례에서 하느님의 훈장을 받다. 

2004년 대입 수능시험을 본 친구들과 1박2일의 짧은 성지도보순례를 했다. 

개략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11월27일 :  오후 3시에 구산성지에 모여 오리엔테이션, 저의 강의(청소년의 신앙과 신앙선조들의 도보), 참회예절과 고해성사, 취침. 

11월28일 : 4시 일어남 , 세면, 아침기도(신앙선조의 모습따라), 구산성지에서 5시 버스를 타고 미리내성지까지 이동, 미리내에서 도보 순례 7시에 출발, 던지실성당(점심), 배티성지(오후4시도착),백곡공소에서 미사, 파견


**나는 이번 수능생 30명과 우리 애주수랑 교사와 함께 도보순례를 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이번 도보순례는 코스는 3번 걸었는데, 한번은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은총의 해에 더욱더 영적성장을 위해, 또한번은 애주수랑(신앙선조들, 순교자들에 대한 프로그램 자원봉사자팀)의 발단식 때, 그리고 이번은 수능생들과 함께 했다. 매번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도보순례의 유감(有感)

우리는 도보순례하는 동안 묵주기도를 바쳤다. 쉬는 시간 없이 출발에서 목적지까지 말이다. 학생들이 제법 잘 따라한다. 간혹 농땡이 부리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래도 100점 만점이다. 

1. 수능생들이 보여준 신앙의 표징

    우리는 대략 묵주기도를 100단 정도를 했다. 

    ①우리 일행이 조별로 소리내어 묵주기도를 하면서 안성시내 지나는데 <옷가게>아저씨우리를 보고 “찬미예수님”한다. 우리일행이 많이 반가웠나 보다. 

    ②더욱 찡한 전율을 느낀 곳은 안성시내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버스기사>분께서 우리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우리 학생을 붙잡고 “어느 성당에 다녀”라고 묻는다. 아마 기사  분께서는 학생들이 대낮에 시내를 활보하며 묵주기도를 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나 보다. <선생님>이 “구산성지”라고 하니까. 

     “응 그래”  “나도 천주교 신자라 물어보는 거야” 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참 기분이 좋았다. 기사 분께서는 마치 자신이 천주교신자인 것이 자랑스러웠나보다. 자신이 이 대열에 함께 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양 주위 사람들에게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니다. 그래 우리의 작은 기도의 힘이 이웃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동적으로 전하는구나 생각하기 천주께 감사다. 


2. 나의 체험

   ①난 그래도 지금보다는 젊었을 때(?) 학생들과 함께 캠프가면 신앙의 추억을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영상물을 찍어 학생들에게 보여 주곤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선생님에게) 너 내 대신 비디오 좀 찍어라” 했더니 나를 중고생 때부터 알던 남자선생님이 “신부님! 옛날 신부님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왜” 내가 물으니 “왜냐면요! 옛날에 사진기, 비디오 가지고 다니면서 앞에 갔다가 뒤에 갔다가 찍었거든요. 그 체력을 보고 싶어요.” “이놈아! 나도 이제는.....”

       그렇다. 몇 년 전만해도 체력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시절이 있는데 “이제는 세포가 점점 늙어가는구나.” 하며 만점이 교차한다. 이때 나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1) 젊어서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해야 한다. 늙어서는 하고 싶어도 경험하고 싶어도 못하거늘.......

           2) 체력을 키워야한다. 그래서 더 건강한 맘과 몸으로 사목해야한다. 

           3) 내 육신 내세포의 소멸이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 ......내의 세포가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위한 세포의 소멸이 되도록 노력해야한다. 

    ② 오늘따라 이 마지막 고개를 쉽게 넘는 것같다. 30km 정도 밖에 걷지 않으니까 했더니 웬걸 마지막 고개서부터는 이상하게 다리가 땡기며 약간의 통증이 온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정도라면 거뜬해야하는데 무릎 뒤쪽의 힘줄이 땡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럭저럭 배티성지까지는 남들에게 표안나게 왔는데 도착하기 더욱 심하게 아파 와서 파스를 뿌렸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젠 내몸을 보링(?)해야 하는 체력인가? ”하며 안타까워했지만 세월의 흐름을 누가 막으랴!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가! 

    ③ 백곡공소에서 파견 미사를 드리는데 걷기가 힘든 거예요. 제대에 올라가는데도 신경을 써야할 정도로 말이다. ▶ 난 직감적으로 “이것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도보순례의 선물이며 훈장이다.”라고 여겼다.  훈장은 내가 영원히 간직하는 보이는 징표이기에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아닌가!!!!!!!

        문득 우리나라의 전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이 떠올랐다. 내 아픈 다리와 그분의 모습이 무지개위해 서로 만나고 있었다. 

          1) 베르뇌 주교님 !  베르뇌 주교님은 신장 결석으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른 선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들보다 더 넓은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고, 더 심한 희생도 감수 하였다. 

          2) 다블뤼 주교님! 다블뤼 주교님은 1847년 봄에【중병】을 앓았고, 또한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져 평생 동안 보행에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런 몸으로 20여년간 사목활동을 하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그의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21년이었다.



▶이번 도보순례에 나에게 이런 아픔의 훈장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다음다음날 내 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느님의 훈장이여! 


작성일 : 2004-12-01